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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5-22 08:37
정조(正祖)가 이름 지은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과 비(碑) - 김광희[향토문화연구위원]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159  

정조(正祖)가 이름 지은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과 비(碑)

                      소재지: 상주시 연원1길 10-14

                      지방기념물 제133호(1999. 12. 30)

 

상주의 명산(名山) 노음산(露陰山, 728.5m)에서 동으로 뻗어 내린 오산(蜈山, 325.9m) 아래 부챗살처럼 펼쳐진 오른편 산자락 끝 연원동에「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과 「충신의사단 비(忠臣義士壇碑)」가 자리하고 있다.

 

충신의사단은 충의문(忠義門)이라 편액을 걸고, 가운데 문에 태극문양을 그린 솟을삼문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숭의당(崇義堂)을 만난다. 정면 5칸, 측면 2.5칸, 중당협실형의 맞배 기와지붕으로 겹처마이다. 그 뒤에 솟을삼문의 내삼문인 경절문(景節門)을 들어서면 충의단(忠義壇)을 만난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 기와지붕으로 5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좌우에 이졸단(吏卒壇)과 장사단(將士壇)은 사방 1칸으로 아주 소박하고 깔끔하다. 또 그 뒤에 사방 1칸의 어제비각(御製碑閣)은 맞배 기와지붕에 겹처마로 풍판을 달았으며, 그 안에 「충신의사단비(忠臣義士壇碑)」가 서 있다.

 

이 단(壇)과 비(碑)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조선 중앙군 종사관인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 박호(朴箎) 3 충신(三忠臣)과 상주 출신으로 의병장이 되어 여러 전투를 벌이다 의롭게 생을 마친 김준신(金俊臣), 김일(金鎰)의 충절(忠節)을 기리는 내용으로 1794년(정조 18)에 세운 비(碑)이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1738년(영조 14) 지역의 사림(士林)은 김일을 제외한 4인을 위한 사당(甑淵祠)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생겨나자 3년 후 다시 없앴다. 그러나 1790년(정조 14) 옛 사당 터에 경절단(景節壇)이라는 제단을 세우고, 이들 4인 그리고, 이들과 함께 순국한 여러 장병 및 나졸들의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1792년 왕(正祖)이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손수 제문까지 지어주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1793년(정조 17)에 의병장 김일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왕이 내려준 교서(敎書)를 바탕으로 1794년(정조 18) 세운 충신의사단비(忠臣義士壇碑)는 도정(都正) 이운영(李運永)의 서(書)로 팔분체(八分體)이다. 낮은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비 몸은 윗변을 반달처럼 둥글게 다듬은 원형(圓形)이다. 교서에서는 이들 5인의 공적을 논하고 있는데, 비문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해 비각(碑閣) 공사를 끝내고, 편액 어제비각(御製碑閣)은 성최열(成最烈)의 서(書)이다. 본래 상주 시내에 있었으나 1986. 10 도시개발과 건물의 노후화로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되었으며, 옛 그 자리에는 충의단유허비(忠義壇遺墟碑)가 자리를 지킨다. 또한 1990년 북천 임란전적지 내 충렬사를 조성하면서 “충신의단비”를 복제(複製)하여 판관 권길 사의비(死義碑)와 함께 비각에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 12월 24일 무자 1번째 기사 1792년)에

「戊子/賜尙州故忠臣尹暹、李慶流、(朴篪) 戰亡之地所建壇號忠臣義士壇, 竪碑記之。 敎曰: "以故忠臣尹暹、李慶流、朴篪等合享, 別享當否, 賜批於嶺儒矣。… 特賜壇號曰忠臣義士壇, 仍自本牧, 每歲春秋, 侑以斗酒盂飯。明春初行也, 當降香, 親撰祭文。道伯巡到時, 爲獻官設行, 又以短碣立之壇後, 前書壇號, 陰記今下有旨, 以示朝家尙忠奬義之意。"(상주 고 충신 윤섬·이경류·박호가 싸우다 죽은 곳에 제단을 세워 충신의사단이라 이름하고 비를 세워 기념하게 하고서 전교하기를,

"고 충신 윤섬·이경류·박호 등을 함께 제향하는 것과 따로 제향하는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해 영남 유생들의 소에 비답을 내렸었다. … 특별히 단호를 내려 충신의사단이라 하고 이어 본 고을에서 해마다 봄가을로 약간의 술과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돕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내년 봄 처음으로 제향을 드릴 때는 내 마땅히 향을 내리고 제문을 직접 지어 내릴 것이다. 도백이 순행 길에 그 곳에 갔을 때는 헌관이 되어 제사를 설행하도록 하고, 또 짧은 빗돌을 제단 위에 세워 전면에는 제단 이름을 쓰고 뒤에는 지금 내린 유지를 기록하여 조정이 충의를 숭상하고 권장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라 적었고, 또한 순조실록(27권, 1825년(순조 25) 8월 20일 갑술 1번째 기사)에도 충신의사단과 관련한 기록이 전한다.

 

상주는 용사(龍蛇)의 난(亂) 때 조선의 중앙군과 왜군이 최초로 전투를 치룬 지역으로 북천(北川)이 그 현장이며, 1592년 4월 25일(양력 6월 4일)이다. 충신의사단과 충렬사에 모셔진 분들은 생명과 가족, 집안을 뒤로하고, 오직 나라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내던진 분들이다. 호국의 달을 앞두고 이러한 숭고한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주 원론적인 생각을 해본다. 지역에는 호국의 발자취가 여러 곳에 있다. 6월에는 한 번쯤 둘러보고 잡초 한 포기라도 뽑으면서 잠시 그분들의 고마움을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 한다. (참고: 忠義壇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