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
 |  로그인  |  회원가입
 
작성일 : 20-03-19 08:32
중모현(中牟縣) 소산봉수(所山烽燧)와 회룡산 봉수(回龍山烽燧) -김광희[상주향토문화연구위원]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196  

중모현(中牟縣) 소산봉수(所山烽燧)와 회룡산 봉수(回龍山烽燧)

 

한반도에서 봉(烽)과 수(燧)의 약정된 신호전달 체계를 이용한 봉수는, 군사 통신 수단을 대표하는 것으로, 조선 시대 500여 년간 국가적인 기간 통신망이었다. 삼국시대부터 활용,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확립되었고, 조선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 크게 정비되어 1895년까지 국가적 규모로 운영되었다. 성격에 따라 경(京)· 내지(內地)· 연변(沿邊) 봉수로 구분하는데, 고려 시대에는 개경의 송악산에 국사당(國師堂), 성황당(城隍堂) 등 2기의 경봉수가, 조선 시대에는 한양의 목멱산(木覓山)에 5개소의 경봉수(1423년 설치)가 전국의 최종 집결지였었는데, 서울 남산에 복원이 되어 있다. 각도 극변(極邊) 초면(初面)의 연변 봉수에서 이른 새벽에 올린 봉화가 대개 12시간이면, 당일 초저녁 무렵 경봉수에 도달한다고 하는데, 이는 시간당 약 100km이며, 경봉수는 병조(兵曹)의 관장 하에 무비사(武備司)가 담당하였다.

 

□ 중모현 소산봉수

소재지: 상주시 모서면 도안리 산44



신라 때 도량현(刀良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도안(道安)이라 이름을 고쳐 화령(化寧)에 속했고, 고려 때 중모(中牟)로 고쳐 상주에 속했는데, 중모현은 오늘날 모서·모동면 지역이다. 모서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49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나아가면 모동면 덕곡리(德谷里)와 경계지점에 도안리(道安里)를 만난다.『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상평역(常平驛)은 중모(中牟)에 있다고 했는데, 이 마을을 도안리 ‘역마루’라고 부른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세조 5년, 1459년)에는

「丁未/兵曹據慶尙道觀察使啓本啓: "尙州洛西·常平·龍山等三驛, 使客往來稀少… 請合洛西于洛陽驛, 龍山·常平于洛平驛" 從之(병조에서 경상도 관찰사의 계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상주의 낙서역·상평역·용산역 등의 3역은 사객의 왕래가 드물며…청컨대 낙서역을 낙양역에 합치고, 용산역과 상평역을 낙평역에 합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 적고 있다. 이로 보면 상평역은 1459년에 없어졌지만, 역(驛)이 있었던 곳이라, 역마루로 부르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마을 뒷산에 중모현 소산 봉수대가 있었다. 역마루 마을 뒤로 올라가면, 소나무 숲속 해발 350m 지점에 5m×5m 크기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2단 정도 둥글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많은 흔적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기와 조각 정도만 보인다. 여기에서 보면 황간 봉대산(소이산)과 화령 국사당 봉수는 거침이 없다. 서쪽으로는 백화산 샛별봉과 팔음산이, 서북으로는 천택산과 봉황산이 조망되고, 동쪽으로는 민묘(民墓)가 있다. 역마루 남서쪽에 동서로 난 골짜기를 봉골이라 부르고, 남쪽의 도량산(352.7m)에는 중모고성의 흔적이 있으며, 모동면 덕곡리는 현청(縣廳)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상산지에는

「中牟縣所山 在縣北南應忠淸道黃澗縣所山西應化寧縣國師堂(중모현 소산 현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 충청도 황간현 소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화령현 국사당산에 응한다.)」라 적고 있는데, 전달체계는 김천 고성산(高城山) 봉수→황간 눌이산(訥伊山) 봉수→황간 소이산(所伊山) 봉수→중모현 소산 봉수→화령 국사당(國師堂) 봉수이다. 소이산 봉수에서는 서쪽으로 영동현 박달산(朴達山) 봉수와 연결되며, 소이산 봉수의 봉대산(熢臺山, 652.3m)은 추풍령면과 황간면 경계에 솟아있다.

 

□ 공성현 회룡산 봉수

소재지: 상주시 공성면 회룡리 산9-2



공성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68호선을 따라 서쪽 모동면 방향으로 나아가면, 백두대간이 지나는 고개 마루 큰재(305m)를 만난다. 더 나아가면 도로는 점점 낮아지고, 그 아래 우하리 양촌 마을(양지마, 양달마)에 닿기 전 오른편에 ‘회룡 목장’ 안내판을 만난다. 이곳에서 노면이 좋지 않은 포장길을 따라 봉골로 오르면, 왼편과 오른편에 독가촌을 만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큰재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에서 출발하는 백두대간 길에 닿고, 여기가 바로 봉우재이고, 회룡 목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양촌 마을 뒷산에 회룡 봉수대가 있었는데,

 

상산지에는

「回龍山烽燧 在功城縣西南應金山郡所山東應靑里西山(회룡산 봉수 공성현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금산군 소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청리현 서산에 응한다.)」라 적고 있다.

회룡 봉수대는 봉우재에서 30분 정도 된비알을 오르면 우뚝한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이곳이 봉우산(일명, 回龍山 541.2m) 정상이다. 측량용 삼각점(상주 314)이 있다. 워낙 낙엽이 많이 쌓여 쉽사리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려우나, 가공한 흔적이 있는 돌들이 보인다. 나무 사이로 청리의 서산봉수는 바로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 조금 물러나 보면 서산 너머로 상주 소산 봉수도 쉽게 보이고, 조금 더 물러나면 아주 평평한 곳도 있다. 동쪽으로 민묘(民墓)가 보이고, 금산 소산 봉수가 있었던 봉화산(감문면 금라리)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봉수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고종 31)을 계기로 봉수제가 폐지되고, 봉수대(烽燧臺)와 봉수군(烽燧軍)을 폐지하라고 명한 것은, 조선왕조실록(고종 32년 윤 5월 9일)에「命各處烽臺烽燧軍廢止 軍部奏請也」라 적고 있는데, 1895년이다.

1895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건만, 우리는 그동안 식량 자급과 경제개발에 힘을 쏟느라 소홀히 하여, 귀중하고 안타까운 문화유적을 많이 잃었다. 마을 어른들께 문의해도 전부 모른다는 얘기뿐이라 답답할 따름이다. 더 늦기 전에 지역에서 봉수대 표식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