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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21 08:37
상주 화동 원통산 아래 봉암서당(鳳巖書堂) - 김광희[상주향토문화연구위원]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261  

상주 화동 원통산 아래 봉암서당(鳳巖書堂)

                상주시 화동면 선교서당마길131

 

국도 25호선 낙서에서 신의터를 올라 화동면 소재지 못미처 북으로 화령과 연결되는 도로로 진입하면 원통산(圓通山, 596.9m) 남쪽 자락에 선교리(仙橋里)를 만난다. 본래 화령현 지역이었다가 후에 상주군 화동면 지역이다. 내가 양쪽으로 갈라진 머리 쪽이 되므로 갯머리, 또는 포두(浦頭). 선교(仙橋)라고 했다. 1914년 봉암리(鳳岩里), 신기리(新基里), 갈평리(葛坪里), 신포리(新浦里), 백자리(栢子里)를 합하여 선교리라 했다. 선교리 표지석에서 서당마는 큰마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아랫마에서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계곡이 갈라지는 곳에서, 서쪽 계곡으로 오르면 526m 峰 남쪽에 있으며, 부엉이가 살던 바위가 있다. 한 때는 위세가 대단하여 분당(分堂)을 하여, 봉암서당(鳳巖書堂)과 응암서당(應巖書堂)이 있었는데, 하여 서당마라 불렀다. 이곳에 아담한 봉암서당이 있다.

 

이 서당은 상산지(商山誌)에는「在州西四十五里化寧圓通山下舊名鳳山因陞院今上庚戌改建今處于」라 적고 있는데, 애초 원통산 서쪽인 화서면 금산리에 있었다고 한다.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 1491~1554) 목사가 상주에 부임하여 18개의 서당을 지을 때, 이미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이 강학하던 봉산서당(鳳山書堂)이었다. 이후 확대 운영하던 중 1688년에 소재 노수신에게 시호(諡號)가 내려지자 서당에 묘우(廟宇)를 건립하고, 향사를 시작하고, 또 1708년에 봉산서원으로 승원 하자, 서당과 서원 이름을 같은 것으로 사용할 수 없고, 한자리에 있을 수 없어 부득이 1730년 원통산 동쪽 선교리로 이건(移建)하고, 편액도 계작(繼作)하여 봉암서당(鳳巖書堂)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5량가 중당협실형으로 팔작 기와지붕이고, 앞쪽 어칸 처마 밑에는 초서체의 봉암 서당(鳳巖書堂) 편액이, 대청 뒷벽 왼편에는 명륜당(明倫堂)· 오른쪽에는 鳳山書院有感醉筆과 鳳巖書堂重修記 편액이 걸려 있다. 양쪽 방의 아궁이는 앞에 있고, 툇마루는 방 앞을 더 높게 하였고, 특이한 점은 정면 기둥 5개 중 가운데 하나는 원기둥이고, 대들보가 아주 웅장하고, 양쪽 방의 천장(天障)이 아름답다.

 

조금 아래 동편에 또 하나의 건물이 있는데, 역시 명륜당 편액을 걸었으며. 역시 정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 철기와지붕이고, 중당협실형으로 정면에는 자연석 주초에 모두 원기둥이다. 주련(柱聯)을 11개나 달았고, 鳳巖書堂上樑文·鳳巖書堂移建記·還建舊基時上樑文 편액이 걸려있으나 건물을 대표하는 편액은 없고, 보수의 손길이 시급한 실정이다.

 

서당의 봉산서원유감취필(鳳山書院有感醉筆)은

「令宰臨歸德。書堂起化寧。當時鹿洞意。今日鳳山名。有傑興規制。無人請額經。回頭二十載。不死老先生。憭慄川原秀。淸幽洞壑寧。多情舊伴會。不記某丘名。松柏何時老。菱荷幾歲經。窮秋存白首。深覺負平生 降菱 戊辰秋日 穌齋(어진 수령이 귀덕(상주)에 부임하여 화령에 서당을 세웠도다. 당시에 녹동의 뜻을 따랐으나 오늘 봉산이 유명하도다. 영걸이 있어 규모와 제는 일으켰으나 청액과 경서를 청할 이 없네. 돌이켜 20년간을 생각해보니 노선생이 살아계심을 알겠네. 요율천 들녘 경치 빼어나고 청유동 골짜기 평화롭구나, 예전에 노닌 곳 감회 깊으나 언덕 이름은 알 수가 없네, 송백은 언제나 늙으려는지 능하는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늦가을 백발 성성한 이 늙은이 평생의 뜻 저버림 깊이 깨닫네. 융경 무진추 일 소재)」이라 적었고,

 

赤龍(丙辰) 秀蔞節에 光山 盧性翰이 撰한 중수기에는

(……중략, 아! 서당(書堂)을 가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보존(保存)하고, 수보(修補)하여 지켜나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요, 보존(保存)하고, 보수(補修)하여 지켜나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서(詩書)를 강론(講論)하고 부지런히 학습(學習)하여, 선현(先賢)들께서 후학(後學)을 인도하는 큰 뜻에 빚을 지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라고 적었는데, 이때 이미 벌써 먼 미래를 본 듯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서당 주변에는 겨우 몇 채의 가옥만이 남아있고, 찾는 이도 공부하는 이도 없이 앞의 작은 개울과 주변의 높은 산은, 적막감을 느끼는 산골 마을이다.

 

서당의 문중 인사들이 읊은 봉암서당중수운(鳳巖書堂重修韻)은 노성한(盧性翰)이 산장(山長)이었을 때의 기록으로, 당원이 중심이 되어 건물을 다시 세우면서 47명이 한시를 읊은 것이다. 그리고, 화동면(化東面) 관제(官堤)에서 태어난 여석훈(呂錫塤, 1890~1958)의 자전(自傳)에는「화동면의 봉암서당(鳳岩書堂)에서 배운 뒤, 옥동서원(玉洞書院)에 가서 사서삼경을 비롯해 본격적으로 유학(儒學)을 수학했지만, 망국을 맞아 유학(儒學)을 그만두고 신학문으로 바꾸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역사 깊은 서당에 많은 고문서와 서책이 있었을 것이나 현재는 총 6종으로 ① 청금록(靑衿錄, 1701.12.6), ②청금록 및 서당조성 돈사록(敦事錄), ③청금록, 정해년(丁亥, 1767년), ④청금록, 경자년(庚子, 1900년), ⑤수정청금록, 정축년(丁丑, 1937년), ⑥봉암서당 절목(節目) 등이 있다.

 

본 서당은 2019년에 중수를 하였으나 고직사는 중수치 못하고, 도로에서 원통산 깊숙한 곳이라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인근에 낙화담, 도안서원, 추원당, 백두대간, 원통산, 판곡지, 느린 세상 요리 공방 등이 있어 조용히 함 둘러보면 옛 선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