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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2-19 08:35
상주 백담(白潭) 조 선생 서당(趙先生書堂)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29  

상주 백담(白潭) 조 선생 서당(趙先生書堂)
상주시 사벌면 덕담2길 129

사벌면 덕담 핸대미 마을에 수백 년의 연륜이 묻어나는 백담 조선생 서당(白潭趙先生書堂)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덕담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온종일 햇볕이 떠나지를 않고, 주변이 온통 배밭이라 부촌을 실감한다. 처음 밀양 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남(南) 씨, 현풍 곽씨, 한양 조씨 등이 살았는데, 조우신(趙又新) 선생의 호(號)를 따서 백담이라 불렀고, 핸대미 라고도 하는 것은 백담을 우리말식으로 부른 것이라 하고, 마을 한가운데로 도랑이 길게 나서 점쟁이가 나지 않는다는 속설(俗說)이 있다.

이 마을 동쪽 끝자락에 윤리(倫理)를 근본으로 삶을 영위한 백담(白潭) 조우신(趙又新, 1583-1650) 선생의 서당과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세덕사는 정면 2칸, 측면 1.5칸의 맞배 기와지붕의 겹처마, 이익공이고 풍판을 달았다. 위패는 선생 내외분을 모셨고, 편액은「世德祠」로 걸었으며, 향사일은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이고, 1988년에 중수하였다. 들판을 가로질러 낙동강 건너 중동의 건지산(乾芝山, 420.9m)을 바라보는 서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의 맞배 기와지붕으로 중당협실형이고, 풍판을 달았으며, 정면 가운데 기둥 하나는 원형이다. 전통기법으로 우물마루를 놓았고, 5량가 건물이나 중도리 2개를 좁게 나란히 배열하고,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여, 여느 건물보다도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천장으로 한양 조씨 가문의 영화(榮華)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백담 선생의 휘는 우신(又新)이고, 자는 여집(汝緝)이며, 본관은 한양(漢陽, 始祖 之壽), 절효공파(節孝公派)로 13세(世)이다. 시조는 벼슬이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에 이르렀으며, 5세(世) 휘(諱) 인옥(仁沃)이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훈(開國勳)에 참여하여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정(忠靖)인데, 자손이 이에 한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상주 입향조는 9세(世) 휘 승손(承孫)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니 이분이 선생의 4대조이고, 처음으로 함창(咸昌)의 옥산리(玉山里)에 살았다. 증조는 휘가 림(琳)인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조부는 휘가 희안(希顔)인데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고는 휘가 상(相)인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현풍 곽씨(玄風郭氏)에게 장가들어 1583년(癸未 선조16) 6월 5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워 보통 아이와 달랐는데, 8세 때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어른처럼 곡(哭)하고 슬퍼하니, 조문 온 사람들이 감탄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임진란에 영남은 적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평소에 엄한 아버지를 섬기듯이 매우 삼가고 공경하는 백씨(伯氏, 克新)를 따라 모부인을 모시고 8, 9년 동안 호우(湖右)로 피란 후 고향에 돌아오니 나이 18세였다. 어려운 가세에 글을 배우지 못하다가 이때에야 탄식하고 말하기를「吾以儒家苗裔 年幾冠首 尙未辨魚魯 豈不爲可羞之甚乎(내가 유가의 후예로서 관례할 나이가 가까웠는데도 글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심히 부끄럽지 않겠는가.)」하고, 이에 글 읽는 이웃의 노인에게 책을 끼고 가서 배우기를 청하니,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마음을 다해 가르쳤다. 선생이 짧은 기간에 공부하여 글 뜻을 환히 깨우치니, 이웃 노인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사양하면서 다른 선생에게 나아가라고 권하였다.

정랑(正郞) 민진(閔瑱)에게 배워 경전에 널리 통달하고, 사장(詞章)을 익혀서 당시 사류(士流)들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대간(臺諫) 홍호(洪鎬, 1586~1646)와 막역한 벗이 되었다. 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 두 분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경(經)과 예(禮)의 의심난 곳을 깨우쳤다. 이후 1613년(광해군 5)에 태학에 들어가 상사생(上舍生)이 되었다. 이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또 당시의 권간(權奸)을 참(斬)하여 신인(神人)의 분노를 씻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조용히 지내며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서 말하기를「天道晦塞 人理斁絶 此豈士君子出身行世之時乎(천도가 막히고 인륜이 끊어졌으니 지금이 어찌 사군자가 나가서 행세할 때이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1644년(甲申)에 경재(卿宰, 宰相)의 천거로 능서랑(陵署郞)에 제수되었고, 1648년(戊子)에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로 전보(轉補)되었다. 그해 겨울에 명경(明經)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6세였다. 경인년(1650, 효종1) 1월 9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68세였다. 선생은 부인 진산 강씨(晉山姜氏)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손(孫) 윤한(胤漢)은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다. 선생은 지강서원(芝岡書院)에 배향되었고, 백담집(白潭集, 4권 2책)이 있으며, 선생의 갈문(碣文)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행장(行狀)은 우헌(愚軒) 채헌징(蔡獻徵)이 지었다.

선생은 창석 이준, 남계 강응철, 충의공 정기룡, 우복 정경세, 사서 전식 등에 대하여 만사(輓詞)를 남겼는데, 그 중 우복 선생에 대한 것을 소개하면
「幷收詩禮入精通 上述宣尼下晦翁 處獨工程如皎日 對人談笑見春風 十寒進退榮兼辱一味明誠達與竆 凾丈問難今已矣 討論誰擊後生蒙(시와 예 모두 뛰어나고 공자부터 주자까지 서술하시며 홀로 공부하실 때는 맑은 해 담소를 나누실 때는 봄바람 진퇴에 온갖 영욕 겪었지만 오로지 명성에만 지극하셨다 여쭈어볼 스승 떠나고 없으니 어리석은 제자 누가 깨쳐 주실지, 白潭遺集卷之一 輓 輓愚伏鄭先生 經世 二首)」이다.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3적신(三賊臣, 정인홍·이이첨·유희분)을 참(斬)할 것을 주장하는 소(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환(仕宦)을 단념하고, 향리로 낙향하여 은거한 올곧은 선비이다. 1622년 낙강범월시회에 참여한 선비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 혼(魂)이 서려 있는 서당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중수의 손길이 시급해 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