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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1-04 08:50
천연요새(天然要塞)속 상주 청계사(淸溪寺)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9  

천연요새(天然要塞)속 상주 청계사(淸溪寺)
상주시 화서면 하송3길 213

청계산(淸溪山, 873m)은 백두대간「갈령작약지맥」상에 솟은 상주의 명산(名山) 중의 하나이다. 이 산줄기 남쪽으로 710m 봉(峰)에서 746.3m 봉(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그 서쪽 사면(斜面)에 성산산성(城山山城)이 축성되어 있는데, 일명 견훤 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천연요새 지역이다. 또 이 산은 ‘대궐터’라고도 하며 삼국시대의 회청색 경질 토기 조각과 고려 시대의 자기 조각, 조선 시대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지역으로 화서면 하송리이다.

이 산 동편 자락 아래에 조계종 산하의 전통사찰(1998.7.21 등록) 청계사(淸溪寺)가 자리하고 있다. 상주시사에는 신라 말(827~898)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고, 20세기 초까지 50여 칸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신라 흥덕왕 7년(832)에 진감국사가 건립한 장백사의 여러 암자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도 하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 절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중기나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도 한다. 상산지에는「淸溪寺 在州西四十里甄萱山城下去乙未兵火燒殘無餘五年前甲子(1924년)女僧一人刱建佛宇自南長寺移安金佛一坐」라 적고 있다. 1730년에는 관(官)에서 절 옆에 창사(倉舍)를 옮겨 세우기도 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화재로 소실된 것을 바로 복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고, 그 후 1924년 청신녀 김씨(淸信女 金氏)가 중창(重創)하였다.

청계천을 앞에 두고 자연석으로 잘 쌓은 축대에 올라서면 극락보전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목재 팔작 기와지붕이다. 정면 가운데는 4폭의 문이고, 양쪽에는 3폭의 문이라 가운데가 넓게 보이고, 단청이 아주 안정감을 준다. 아미타불과 협시불도 아주 미려(美麗)하고, 수미단과 닫집의 단청이 은은(隱隱)하며, 보개천장에는 두 마리의 용(龍)이 사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극락보전 좌우에는 진일당(眞一堂) 등이 있어 넓은 대지가 아늑하게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산신각(山神閣)이 자리하여, 전체적으로 청계사의 모습은 아주 간결하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산기슭에 부도(浮屠) 2기는 석종형(石鍾形)으로 정부(頂部)에는 앙련(仰蓮)을 조식(彫飾)하고 기단을 갖추었다. 영월대선사탑(影月大禪師塔)과 춘파대선사탑(春坡大禪師塔)이라는 명(銘)이 있어 주인공을 알 수 있으며, 뒤편 농로 옆 큰 암석에는 남무산왕지위(南無山王之位)라는 암각서도 보인다.

역사적으로 상주는 매우 중요한 곳으로 이곳을 지배하면 얻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한반도에서 일어난 병난(兵亂)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겪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주에는 무엇보다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고, 유적지 또한 많은 곳이다. 특히, 한 고을에서 세습이 아닌 세 나라의 왕을 배출한 지역은 쉽지 않은데, 바로 고대 사벌국과 함창 고녕 가야국,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이다. 청계사는 역사적 흔적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후백제 견훤 왕묘(甄萱王廟)와 대궐터, 견훤 성, 차단 산성 등이다. 그리고 병풍처럼 돌린 절벽과 칼 같은 산세는 자연 그대로 이곳이 천년의 요새로 손색이 없다. 지명도 독특하여 무고동골, 미드락골, 배나무골, 불당골, 산봉골, 높은 터(高基), 큰 가마소, 작은 가마소, 투구봉, 투구 바위, 대궐터, 점마, 원통암 터, 대원암 터 등으로 나름대로 의미가 깊다. 지금은 ‘맑은 개울 캠핑장’이 조성되어있는데,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돌탑과 청계수호탑(淸溪守護塔)이 서 있다.

제2대 동학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선생은 동학혁명에 실패한 후, 1896년 3월 초에 청계사 계곡 높은 터(高垈, 高基) 깊은 산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호남도인(湖南道人) 이병춘(李炳春)이 신사(神師)의 주소(住所)를 알지 못하여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하루는 상주(尙州) 청계사(淸溪寺)에 들어가 자게 되었는데, 꿈에 신사를 뵙고 주소를 물었더니 신사(神師)께서『네 이 근처(近處)에 있노라』하므로 꿈을 깨어 그 근방(近傍) 산곡(山谷)을 찾아 헤매었다. 화전민(火田民)들이 모여 사는 높은 터(피난지로 임진왜란 때부터 마을이 형성됨)에 이르러 한 조그만 집에 들어가 보았더니 해월 신사가 이 집에 있음으로 이병춘(李炳春)이 놀라
절하고 꿈 이야기를 하자 신사께서『네 힘써 호남(湖南) 일을 보라』하고 도(道)의 장래(將來)를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상주 출신 금포(錦圃) 노병대(盧炳大 1856~1913) 선생이 1907년 8월 20일 ‘종사를 보전하고 황제의 굴욕을 설치하며,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속리산에서 창의한 후 여러 차례 일본을 공격하고, 방어하기가 쉬운 이곳 청계사로 진을 옮겼다. 그러나 청계사는 11월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계속 일본에 항거한 금포 선생은 거사할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여 끝내 굴하지 않자 일경은 그의 한눈을 제거하였다. 여러 고초를 겪어 옥중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28일 만인 1913년 7월 10일에 피를 토하고 순국한 강직한 인물이다. 그리고 6·25 때 이 일대는 대승을 거둔 화령전투 현장으로 옛 송계초등학교에는 ‘화령전승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 선생의 시(詩)에서는
淸溪寺步南友韻(나의 벗 남한조의 운을 따라 청계사 시를 짓다)에서
「亂峽淸溪束幽蹊古寺竆千章圍院樹萬仞壓簷峯佛有金身儼僧無貝葉通偶因離嶽路經過費鞋筇(어지러운 골짜기 청계로 모이고, 호젓한 오솔길 끝 고사(古寺)가 있네. 울창한 나무숲 절간을 둘러싸고, 만길 봉우리 처마를 누르는 듯. 불상은 금빛으로 의젓한데, 스님의 경전 소리 들리지 않네. 산길 험해 어쩌다 길을 잃어, 신발과 지팡이만 닳았네.)」라고 남겼다. (立齋先生文集卷之三, 한글 번역 김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