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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25 08:45
상주 사벌 엄암 상암재(商巖齋)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28  

상주 사벌 엄암 상암재(商巖齋)
상주시 사벌면 엄암리 519-2

상주 사벌 엄정마을 마을회관 중건 기념비에「뒷산의 구수산(丘秀山), 동편의 삼봉산(三峰山), 남쪽의 풍암산(風巖山)을 병풍 삼아 천오백 년 역사를 지켜 온 축복받은 고장 엄암! 옛 사벌국의 후예로서 삼국통일의 민족정기와 백척간두의 조국을 수호한 낙동강의 충절이여! 조국 통일의 그 날까지 살아 숨 쉬리! 하늘의 음덕을 받은 우리 엄암인들과 후손들이 영원토록 행복하고 번영된 미래의 염원을 여기 마을회관 중건에 담노라.」라 적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엄정리(嚴井里)와 풍암리(風巖里)를 합쳐 엄암리(嚴巖里)라 했다.

남쪽으로 금흔리와 사이에 상주 최고(最古)의 이부곡토성(吏部谷土城)은 신라 첨해왕(재위 247~261) 때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멸망된 사벌국(沙伐國)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삼국시대 토기 조각, 토광묘, 초기 철기시대의 무문토기와 주조철부 및 와질 제의 주머니호 등이 채집되어, 이성(城)은 그 조성연대가 원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정(嚴井) 마을의 동명(洞名)을 말해주듯 수령이 만만찮은 고목의 팽나무 아래 맑은 물을 자랑하는 큰 샘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기도 하다. 남쪽 큰 나무숲에는 고풍스러운 상암재(商巖齋)가 숨어있는데, 사벌면지에는 상암사(商巖祠)라 적었다.
목조 기와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 겹처마에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고, 담장을 둘러 아늑하고,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이 재(齋)는 1935년에 상암재기(商巖齋記)를 걸었는데, 김녕 김씨(金寧金氏, 始祖: 文烈公 時興) 상주 사벌 엄암 입향조(入鄕祖) 상암(商巖) 처사(處士) 김한영(金漢永, 14世)을 모시기 위한 공간이다. 김녕(金寧)은 경남 김해(金海)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한 곳이다. 고려 말에 김해로 개칭되어, 수로왕(首露王) 계통의 김해 김씨와 혼돈되므로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으로 불렀으나, 1884년 후손들이 탄원하여 예조(禮曹)의 비준(批准)을 받아 왕명(王命)으로 관향을 김녕(金寧)으로 확정하였다.

상암 처사의 자(字)는 순경(舜卿)이고, 부(父)는 휘(諱) 승란(承蘭)이고, 모(母)는 회산 황씨(黃氏)로 묘소는 실전(失傳)하여 풍암산록(風巖山麓)에 단(壇)으로 모셨다.
충의공파(忠毅公派)로 파조(派祖)는 백촌(白村) 휘(諱) 김문기(金文起, 9世)이시며, 상암 처사는 백촌 공의 5대손이다. 백촌 공은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端宗復位)의 모의(謀議)에 가담하여 모의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李塏) 등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바로 병자사화(丙子士禍)이다. 이 때문에 후손은 영호남으로 흩어져 살게 된 원인이 되었다. 영조 때 9대손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복관(復官)되었으며, 김천시 대덕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또한 1981년 서울시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고, 그의 가묘를 서울시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설치했다. 백촌 공의 자(字)는 본래 효기(孝起)였으나 장인(丈人)인 선산김씨 문정공(文靖公) 주촌(注村) 김효정(金孝貞)과 같은 효(孝) 자(字)라 문(文)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인 문정공의 유택은 신도비와 함께 상주 낙동 홍일묘(紅日廟) 앞에 모셔져 있다.

상암재기(商巖齋記) 소개하면
「무릇 사당을 지어 선조를 숭모함은 그 집안의 의리를 돈독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 우리 단종(端廟)이 임금의 자리를 내놓았을 때 백촌(白村) 선조와 6명의 신하들이 힘을 합해 일을 도모하다 어려움을 겪더니 결국은 백촌 부자가 순절한 이래로 나라에서 이들을 회피함이 더욱 심해져 후손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영남과 호남으로 흩어진 지 수백 년이 되었다. 우리 12대조 처사 공은 충의 공의 5세손으로 임진란 때 이곳으로 옮겨와 이후 자손들이 이곳에서 살 게 되었다. 분묘 역시 마을 앞 언덕에 자리 잡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찌 정성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급변하고 윤리 기강이 무너진 오늘날 더욱 숭모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다. 그러므로 화수회에서 제수를 분담하고 또한 사당이 없어 매우 불편하기에 종숙 형기(炯基) 씨와 아우인 병규(炳圭)가 비로소 서로 상의하고 힘을 모아 기금을 만들어 사당을 짓고 편액을 ‘상암(商巖)’으로 정했다.

‘상’은 우리 선조의 고향이며 ‘암’은 선조가 묻힌 언덕이다. 어찌 이름의 의미를 살펴보지 않을 수 있는가? 또 다른 의미는 상(商)나라 부암(傅巖) 출신 현신인 부열(傅說)이다. 부열의 드러나고 숨음이 때에 맞아 올바른 길을 택했으니 어찌 의리에 부합하지 않으리오. 생각건대 우리 후손들이 성심으로 선조를 섬기고 진실한 마음으로 동족을 도탑게 하고 때에 맞추어 이 사당을 수리해 영구히 전한다면 어찌 진씨(甄氏)의 사정(思亭)만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역사에 남으리오. 거듭거듭 힘쓸지어다. 이어 시 한 수를 짓는다. 수년에 걸쳐 사당을 만든 공을 알리오니 세월이 흘렀지만, 추모의 정이 더욱더 새롭다. 언덕의 소나무는 추위를 견디며 홀로 서 있고 우리들 후손은 어려움을 참으며 오히려 꿋꿋하다 주렴을 걷으니 강바람이 매악산 아래 불어오고 배를 저어 강월을 맞이하니 경천대가 우뚝하다 다만 이 사당이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효성 하나만은 영원히 머물기를 바랄 뿐이다. 을해년(1935년) 음력 오월 후손 훈규가 삼가 글을 짓다.」라 적고 있다.

선조께서 거듭거듭 힘쓰라고 당부한 말씀대로 이러한 재실(齋室)이 유지되어 한 가문의 역사와 전통이 줄기차게 이어져 문중은 물론 지역사회에도 많은 보탬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해제 김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