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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9-02 08:29
풍헌(風憲) 서경순(徐敬淳) 송덕비(頌德碑)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44  
풍헌(風憲) 서경순(徐敬淳) 송덕비(頌德碑)
상주시 공검면 지평리 7-1

상주 공검 경들 마을 입구에「풍헌서경순송덕비 경인 삼월 일 입(風憲徐敬淳頌德碑庚寅三月日立)」이라 새긴, 72cm 정도의 소박한 한 기(基)의 호패형(號牌形) 풍헌(風憲) 비(碑)가 서 있다. 이곳은 속리산 형제봉(兄弟峯, 832m)에서 발원(發源)한 이안천이 은척의 시암천(柹岩川)을 만나, 공검의 중소와 지평, 예주를 지나면서 몇 구비나 심한 소용돌이를 치면서, 청암 서원 앞 협곡을 치고 나온다. 경들 마을은 작약산 도솔봉(兜率峰)에서 동으로 뻗어 내려 솟은 대가산(大駕山, 325.2m) 줄기를 뒤로하고, 들판을 가로질러 앞에는 갈모봉이 솟아 있다.

상산지(商山誌) 면명(面名) 편에는 풍헌(風憲)을「按舊制面置風憲洞置尊位各行其事矣距今二十年前丁未姶革其號改風憲爲面長改尊位爲區長(구제의 면에는 풍헌을 동에는 존위를 두어 행정 하게 하였으나, 1907년(순종1)에 관제를 변경하여 풍헌을 면장으로 존위를 이장 구장으로 개칭하였다.)」라 적고 있다. 풍헌은 조선 시대 향소직(鄕所職)의 하나로 면(面)이나 리(里)의 일을 맡아 보는 사람으로, 풍기(風氣)를 바로잡고, 관리의 정사청탁(正邪淸濁)을 감찰 규탄하는 직임(職任)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 고려 시대의 사심관제(事審官制)를 본떠 유향품관(留鄕品官)들이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鄕風)을 바로잡기 위해 유향소를 조직하였다.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1488년(성종 19) 다시 설립되었다. 이듬해에는 향임으로 유향품관 가운데에서 좌수(座首) 1인과 이를 보좌하는 별감(別監) 3∼5인을 두어 유향소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 뒤 점차 지방마다 지역 사회의 지도층인 사족(士族)으로 구성되는 계(契)가 조직되고, 그 명부를 향안(鄕案)이라 하였으며, 향안에 등록된 구성원을 향원(鄕員)이라 하였다. 유향소의 향임(鄕任)은 계(稧)의 집행 기구로서 향원 중에서 선출하였다. 그 후 여러 부작용이 일어나면서 풍헌이나 감관은 간사한 백성들이 향임의 빚을 대신 내고, 훔쳐 얻는 자리가 되었다. 말단 행정의 부정부패는 극한에 이르러 비록 양반 위주이기는 하지만 지역 사회의 권익을 대변하던 향임 들은 일반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풍헌(風憲) 서경순(徐敬淳, 1850~1896)은 본관이 달성(達城, 始祖: 徐晋)이고, 학유공파(學諭公派)로 23世이고, 경순(敬淳)은 자(字)이다. 배위는 성주 여씨(星州呂氏)로 유택은 예주리(曳舟里)에 합분(合墳)이다. 풍헌 서공(徐公)은 당시 경들 마을에 우거(寓居) 하면서, 마을의 대소사(大小事)를 내 일처럼 생각하면서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인근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에 서공(徐公)이 돌아가시고 난 뒤 마을에서 마을 어귀에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碑)를 세웠다고(1890년) 한다. 그 후 도로가 확장되면서 뒤쪽 산 밑으로 옮겨 세워 마을과 지나는 길손을 맞이하고 있는데, 지금도 후손들이 매년 가을에 묘소 벌초 때 비(碑) 주변에도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있다.
상주에는 또 한 기(基)의 풍헌(風憲)의 비가 서 있는데, 이는 함창과 이안 경계지점인 함창읍 교촌리이다. 자연석에 호패형으로 다듬어 각인(刻印)하였는데, 풍헌이동형불망비 경인 사월 일 입(風憲李東馨不忘碑 庚寅四月 日 立)」으로, 역시 동년 1890년이고, 4월이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이공(李公)에 대하여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선 선조 때 뛰어난 신선(神仙) 최풍헌(崔風憲) 이야기가 많이 회자하고 있는데, 옮겨보면 신선은 대체로 모습을 감추고 살지만, 가끔 인간 세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 인물의 깊이를 알아보기는 힘들다고 하며, 앞일을 예지하는 능력이나 위급한 상황에 접하면 그 일을 해결하는 능력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한다. 임진란 때 최풍헌은 전남 고흥사람으로 밤, 낮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동리 사람들에게 욕설하고, 툭하면 행인에게 시비를 거니, 모두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류 훈장만은 그런 풍헌을 그때마다 타이를 뿐이니, 이는 풍헌이 명민(明敏)하고, 지혜가 뛰어나므로 일찍부터 범상치 않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왜병이 침입하리라」는 떠도는 소문에 민심이 크게 소동하거늘 류 훈장이 풍헌에게 피난할 일을 부탁하였으나 풍헌은 “알지 못한다.”며 수차 사양할 뿐이었다. 하루는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가산과 전답을 다 팔아서 나에게 맡기라」하여 훈장이 풍헌을 믿고 그대로 따랐지만, 풍헌이 그 돈으로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히 지내다가 갑자기 한 달 동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풍헌이 사망했다.”는 부고가 날아와 훈장이 크게 놀라 풍헌의 집에 찾아가니, 풍헌의 막내아들이 건(巾)을 쓰고 곡(哭)을 하면서 훈장을 맞으니 사실이었다. 훈장이 유언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류 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솔(家率)과 더불어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르게 하여, 지리산 아무 골짜기에 장사지내라 하였습니다.」하는 것이었다. 훈장이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의논하니 모두 곧이듣지 않고, 막내아들 하나만 뜻을 따르거늘 사흘 뒤에 운상(運喪)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니, 골짜기 위에서「상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오라」는 소리가 있어 바라보니 풍헌이었다. 이에 상여를 버리고 올라가니 그곳에 가옥을 지어 놓고, 양식을 풍부히 마련해 두고 있었다. 얼마 후에 밤이 되어 살던 마을 쪽을 바라보니 불빛이 환하거늘 풍헌이 말하기를 “이는 왜병이 침입하여 온 마을에 불을 지른 것이라”하니 훈장이 탄복하였다. 그런데 이 골짜기 위에서 본 최풍헌의 얼굴이 본래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였는데, 최풍헌이 조선의 선조에게 자신에게 병권(兵權)을 맡겨주면 임진왜란을 3일 안에 끝낼 수가 있다고 했는데, 왕과 대신들이 모두 반대를 하였으며, 최풍헌이 그러면 자기 홀로 병권 없이 나가 싸우라고만 명령을 내려 달라고 했는데, 그마저도 거절을 당하였다고 하는 최풍헌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많은 비(碑) 중에서 풍헌(風憲)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인근에 이름이 6개나 되는 지평 저수지와 인구문(印龜文) 효자각, 그리고 김축(金軸) 부자(父子)의 충효각 등이 있다.
(참고: 네이버, 달서 서씨 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