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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01 08:32
상주시 왕산(王山)의 백우정(百友亭)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84  

상주시 왕산(王山)의 백우정(百友亭)
상주시 서성동 163-48

상주시가지 중심에 아름답고 앙증맞은 왕산(王山, 72m)이 있다. 비록 그 높이는 낮으나 대단히 큰 주산(主山)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 상 백학산(白鶴山, 615m)에서 북으로 뻗어 갈방산(509.3m)을 이루고, 개운재를 지나 학마루로 내려앉아 다시 남산(南山, 156.1m)을 솟구치고, 중앙공원 석벽(石壁) 언덕배기를 지나 상주의 명산 왕산을 낳았다. 노악(露嶽)·석악(石嶽)·연악(淵嶽)이 이산을 알처럼 품고 있으며, 남천과 북천이 탯줄처럼 그 기운(氣運)을 낙동강으로 멀리 이어 남해에까지 미치게 하므로, 삼악(三嶽)과 삼산이수(三山二水)라는 말이 왕산을 중심으로 생겼다고 한다.

병오년(1966)에 왕산 노인회(회장: 추광엽)를 창립하여, 이산을 정비하고, 문화를 일으키고, 공익을 위하는 일로 왕산을 가꾸는데 앞장을 섰다. 이산의 남쪽 끝자락에 아담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백우정(百友亭)은 산정형(山頂形) 정자로 노인들의 친목과 휴식공간을 제공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면 2칸, 측면 1.5칸의 목재 기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두리기둥과 납도리에 초익공이다. 또한, 작은 보위에 낮은 동자주를 세우고, 중도리 칸을 반자로 마감한 보개(寶蓋)천장이다. 평난간에 풍혈(風穴)은 아주 크게 뚫었고, 각 부재는 화려하게 단청을 하였으며, 보에 그려진 호랑이와 용 비늘, 벽화 등 보기가 쉽지 않은 채색(彩色)을 자랑한다. 이 정자의 연륜은 반백년(半百年)으로 왕석(往昔) 독지일(篤志逸) 옹(翁)이 1970년에 창건했다고 전 하는데, 당시 은척면 하흘리의 옥하정(玉下亭)을 해체하여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십수 년을 지나 풍우에 기울어져 붕괴 직전에 이른 것을 벽담(碧潭) 김천수(金天洙)와 중앙동장 이도근(李道根) 씨 등이 1991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중수 기문이 셋이나 걸려 있었으나 하나는 없어지고, 둘은 걸려 정자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자이다.

기문을 적어보면
「商山邑邸中央 山有一小山是所謂央山也 山之形則不大而山之位則實富焉 甲長飛鳳拱揖於前後洛江北川灣回左右百里沃野延……九老之會四皓之仙怳若復覩於千秋之後詩曰豈弟君子爲神所勞想必央山之靈黙佑於來後而賜無窮之樂也是爲記. 庚戌 流火節 仁州 張炳達 記 淸道 金圭浩 書(상산의 도시 중앙에 하나의 작은 산이 있어 이를 왕산이라 한다. 산의 형상은 크지 않으나 산의 지위는 넉넉하고 여유롭다. 갑장산과 비봉산이 함께 두 손을 모아 엎드려 있고, 낙동강이 흐르며 북천이 좌우를 구비돌아 흐른다. 백리의 비옥한 평야는 ……구노지회나 사호들의 모임을 천년 후인 오늘에 다시 보는 것과 같구나, 이에 시를 지어 이르노니 제군자들이 신성한 장소를 위하는 노고를 왕산의 신령은 반드시 잊지 않고 소리 없는 도움으로 무궁한 즐거움을 내려 주리라. 경술 유화절 인주 장병달 기 청도 김규호 서)」이다.
또 하나는 1991년(辛未) 염하(炎夏)에 박무대(朴茂碓) 왕산 노인정회장이 쓴 백우정 중수기가 걸려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31대 신문왕 7년(687년) 주위 1천 1백 9보의 상주 성을 쌓고, 성(城)의 4대문 중앙에 자리 잡은 작은 산이라 했는데, 상산(商山)의 진산(鎭山)인 왕산은 도심 한복판에 솟아 임진왜란 전까지 이 산을 중심으로 68명의 문과 급제자가 나와 장원봉(壯元峰)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31대 공민왕 11년(1362년)에 홍건적 침입으로 고려 왕실이 상주목 상주 성을 임시거처 행궁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 경상감영이 자리했던 곳으로 주요 관아 시설 중 지방 수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은 1901년에 소실되었고, 상산관, 태평루, 침천정 등은 임란북천전적지 경내로 옮겨 세웠다.

19세기 말까지 이산을 배산(背山)으로 앞에 상주 관아가 있었고, 옛 상주목성도를 보면 왕산 주변으로 관아 건물이 들어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 점령으로 훼손된 데 이어 일제 땐 산봉우리를 깎아내고 쇠말뚝을 박는가 하면, 이름마저 앙산(央山)으로 바꾸고, 신사를 설치하는 등 훼손을 거듭하여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이후 지금은 작은 언덕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나 왕산 자락에 거대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14기(基)의 크고 작은 목민관의 선정·애민·송덕·불망·기념비들은 이곳이 천년고도의 중심지였음을 더듬게 해준다.

여기에 바다와 이어진 연못이 있어 자오 시(子午時)에 조수(潮水)가 들어오고, 조수가 이정(夷亭)을 지나면 장원(壯元)이 난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연못을 조성하고, 그 앞에 풍영루(風詠樓)를 세웠으며, 여러 수의 시(詩)가 석면(石面)에 새겨져 있고, 동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소녀상이 있다. 이어 수령 수백 년을 자랑하는 고목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상주 복룡동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19호)이 동향으로 앉아 있는데, 시민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는 상주 보물이다. 정상에는 왕산만큼이나 작은 자연석에 장원봉(72m)이라 표석을 세웠다. 남으로 내려가면 을사늑약(1905년) 체결 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쓰는 등 상주 출신 언론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의 기념비가 서 있으며, 그 끝자락이 백우정이다. 뒤편으로 금도랑에 관한 얘기도 보이고, 남쪽으로 여러 기의 비(碑)중에 아주 해학적인 귀부(龜趺)의 모습이 둘이나 있으며,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잔디광장도 볼만하다.

속설(俗說)에 왕산을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소원을 말하면 한 가지는 들어준다고 하는데, 2007~2011년에 왕산역사공원으로 조성하여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이곳에서 크고 작은 여러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편액 백우(百友)는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서 나왔다. 옛적 백제(百濟)국을 처음 세울 때, 열 사람이 일을 함께 시작하여 백 사람에 이르렀으므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뒤에 백제로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병풍산과 더불어 2천 년 고도(古都) 상주 역사의 비밀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이곳이기에 더 많은 시민의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