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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7-10 09:07
상주시 남적동 상주 목사 이협(李埉) 선정비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85  
상주시 남적동 상주 목사 이협(李埉) 선정비
 상주시 남적동 606-131

백두대간 밤원숭덕지맥 상 노음산(露陰山, 728.5m)에서 천봉산(天峰山, 435.8m)으로 이어져 다시 북(北)으로 황골산(黃骨山)을 이루니, 이를 천봉소맥(天峰小脈)이라 부른다.
황골산 북쪽 끝자락에 큰 마을이 형성하니 남적동(南積洞)이다. 본래 상주군 외서면 지역이었는데, 외서천 남쪽이 되므로 남적이라 했으며, 1924년 남상리(南上里)와 남하리(南下里)를 합하여 남적리라고 했고, 1986년 상주가 시로 승격되면서 상주시로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세천은 남적 동쪽에 있는 마을로 세천교가 놓여 있으며,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라 한 때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답게 교량이 4개소나 가설되어 있으며, 교량이 낡아 차량 통행이 어려운 구 세천교 입구에 상주 목사 선정비가 세워져 있는데, 명문(銘文)은 중앙에「牧使李候埉僧人善政碑」와 좌우에 비문(碑文)도 한 줄씩 새기고 있으나, 읽기가 쉽지 않으며 1808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수(碑首)와 비신(碑身)은 일체형으로 높이 150cm 정도이고, 넓이는 46cm 정도로 비좌하엽(碑座荷葉)의 형태이다. 본래의 자리는 현재의 자리에서 약 50여 m 동편에 있었으나, 국도 3호선 확·포장과 88올림픽 환경정비 시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移建)한 것이다. 노인들의 구전에는 이곳이 예전에 한양 과거 길이라 내왕하는 사람이 많아 세운 것이라 추측된다고 하는데, 휘(諱) 자(字) 뒤에 승인(僧人)이라는 글자가 보기 드물게 이채롭다.

이협(李埉, 1696~1769)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字)는 대방(大防)이다. 증조부는 이조판서 미강(眉江) 이경증(李景曾), 조부는 대사간 이혜(李嵇), 부는 통덕랑 이희남(李喜楠)이다. 1723년(경종 3)에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상주 목사를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들 넷을 두었으며, 재임기간(1746.10~1750.3)에 선정(善政)을 베풀고, 문학적(文學的)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상산지「청대본」은 1749년(영조25)에 이협(李埉) 목사의 권(勸)에 따라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주관하여 속지(續誌)를 내었다.

1746년에 낙강(洛江)에 있는 자천대(自天臺)의 무우정(舞雩亭)을 중수하고, 잔치를 베풀어 시회를 가졌는데, 목사를 비롯하여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등의 상주 선비들이 참석하였다. 목사 이협이「우정중수낙성운(雩亭重修落成韻)」시(詩)에서 「八字碑書勢若飛 至今淸節長殷薇 臺前日月王正是 山外滄桑世事非 滿地雲陰嗟歲暮 虛庭梅蕚自春輝 最憐鳴咽寒江水 猶復朝宗滾滾歸(여덟 자 비석 글씨 날을 듯 기운찬데, 지금도 맑은 절개는 은(殷)의 고사리로 자라네. 자천대의 세월은 문왕의 명대 통일에 바르고, 산 밖의 변한 세상일 마다 그르네. 온 세상 뒤덮은 구름에 또 한 해 저묾을 탄식하는데, 빈 뜰의 매화 봉오리 절로 봄빛 띠었네. 지극한 슬픔에 흐느끼는 찬 강물은 오히려 쉼 없이 흘러 바다로 모이네.)」라 읊었는데, 이는 이 정자의 주인이었던 우담 채득기의 숭명사상이 집약된 여덟 자(대명천지 숭정일월)는 은나라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면서도 충절을 지켰던 고사와 일치함을 노래하였다. 또한 무우정 중건기문도 남겼다.

법주사 대웅보전 비로자나불상은 1592년 임진왜란에 화재로 소실되고 난 후, 1626년에 다시 조성되었고, 124년 후인 1747년(영조 23)에 3월부터 시작해 7월 4일에 개금(改金)을 했다. 이때의 기록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비롯한 숭록대부 지내시부사 이경화, 병마절도사 심봉양, 상주 목사 이협 등 왕실과 고위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는데, 왕실이나 지방의 유력자들이 불상 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개금기에는 사도세자를 비롯한 왕실과 상주 목사 등이 시주자로 등장하고 있어, 조선 후기 불교계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이 되고, 이협 목사는 불교와의 인연도 깊다고 생각이 된다.

또 1753년 삼척 부사 재임 때는 관아(官衙) 구기(舊基)를 수리하다가 서대 및 기책(記冊)을 발견하고, 이를 조정에 상주(上奏)한바, 영조(英祖)가 어제홍서대기(御製紅犀帶記)를 내리니, 홍서대각을 짓고 봉안하였다. 현재 실직왕묘 내 보대운한각(寶帶雲漢閣)에는 홍서대와 서대기책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영조실록 81권(영조 30년 1월 1일)에는「先是關東御史李顯重歸奏: "三陟府使李埉, 得一紅犀帶於府中, 傳言是洪武癸酉, 太祖大王以三陟是穆祖外鄕, 特賜犀帶於其時戶長, 今回六癸酉, 而始得之云。" 上命本府, 上送戶長金尙矩齎帶而來, 上特召見, 仍令銓曹除尙矩爲參奉(이에 앞서 관동 어사(關東御史) 이현중(李顯重)이 돌아와 아뢰기를, "삼척 부사(三陟府使) 이협(李埉)이 부중(府中)에서 홍서대(紅犀帶) 하나를 얻었는데, 전하는 말로는 홍무(洪武) 계유년에 태조 대왕께서 삼척은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그때의 호장(戶長)에게 특별히 서대를 내리셨는데 이제 여섯 번째의 계유년이 돌아와서 비로소 얻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본부(本府)에 명하여 호장 김상구(金尙矩)를 올려보내게 하였다. 김상구가 서대를 가지고 오니, 임금이 특별히 소견(召見)하고, 이어서 전조(銓曹)로 하여금 김상구를 참봉(參奉)으로 제수(除授)하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서대(犀帶)는 조선 시대 벼슬을 가진 관리가 한복(韓服)이나 공복(公服) 등의 겉옷에 두르던 띠로 겉에 물소 뿔로 만든 장식이 달려 있다. 이 홍서대(紅犀帶)는 태조 2년(1393) 삼척이 목조비(穆祖妃)의 외향(外鄕)이고, 선대묘(先代墓)인 준경·영경묘가 소재하는 곳이라 하여 삼척지역을 부(府)로 승격시키는 한편, 홍서대 1점을 하사하고 삼척 부사로 하여금 봉안토록 한 것이다.

그리고 기묘(己卯, 1759) 중추(中秋)에는 외예(外裔)로서 ‘김해배씨세보(金海裵氏世譜)의 서문(序文)을 쓰기도 하였다.

상주지역에는 목사와 관련하여 송덕(頌德)·불망(不忘)·선정비(善政碑) 등 총 40여 기(基)가 수립(竪立)되어 있는데, 유언현(兪彦鉉, 재임 1778.2~1779.12) 목사의 비(碑)가 4개소(낙동, 공성, 화서, 은척)로 가장 많으며, 민종열·이장소·조병노 목사가 각 3개소이다.
(참고: 불교신문 3266호/2017.1.18. 상주·함창 목민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