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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21 08:40
상주 화서·화남 성산산성(城山山城)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566  
상주 화서·화남 성산산성(城山山城)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 산42와 화남면 동관리 산2

우리나라 큰 산줄기(白頭大幹)가 상주 청화산에 들어와 절승(絶勝) 문장대(文藏臺, 1054m)를 낳고, 상주 최고봉 속리산 천왕봉(天王峰, 1058m)을 솟구친다. 다시 남(南)으로 형제봉에 이르러 본줄기는 화령의 봉황산으로 보내고, 동(東)으로 갈령(葛嶺)으로 내려앉아 다시 일으키니 청계산(淸溪山, 877m)이다. 여기에서 북(北)으로 남산과 작약산으로 이어지니, 이를 우리는 갈령작약지맥이라 한다. 청계산에서 다시 남으로 한 줄기를 형성하니 ‘대궐터’와 ‘견훤성’이라 부르는 곳이다.

상산지 성지(城池) 편에「城山山城 有州西四十里舊在淸溪山上有倉舍雍正丁未火燒庚戌移建于淸溪寺傍加築城堞于水口(州의 서쪽 40리에 있다. 옛날 청계산 위에 창사(倉舍)가 있었는데, 1727년(영조3)에 불에 타서 1730년 청계사 옆에다 옮겨 세우고, 수구에 성첩을 쌓았다)」라 적고 있으며,
영남 지도(嶺南地圖1746~1760)에는 견훤산(甄萱山)으로, 산성은 성산산성(城山山城)으로 적고 있으며, 또한 「城山山城倉距官門五十里」와「城周回五千三百五十步」라는 기록도 보인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상주 서북쪽 50리에 있는 성산(城山)이라는 고성(古城)이 곧 화창현성(化昌縣城)이라고 하였고, 대동여지도(김정호 제작)는 이 산성 아래에 화창(化昌)이라고 표기하여 옛 화창현이 이곳임을 알리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1830년 작성된 상주지도인 「화서면도(化西面圖)」에는 산성 앞에는 청류문(淸流門)이 있었고, 지금의 극락정사(極樂精舍) 자리에는 청계사(淸溪寺)가 있으며, 그 동남쪽에 견훤 창(甄萱倉)이 있다. 청계산의 서쪽에는 내원암(內源菴)이 내원암의 북쪽에는 대원암(大源菴)이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내원암은 용바위 서쪽에 있는 건물지로 추정되고, 지금도 석축과 우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원암은 안 대궐 터 북쪽 골짜기에 건물터와 골짜기 아래로 지금도 물이 나는 우물이 있고, 산등성이에 연못의 흔적이 있는 곳으로 추정이 된다.

이 산성은,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와 화남면 동관리에 있는 고성(古城)으로, 일명 견훤성 또는 대궐터라고도 불린다. 49호 국지도 변에서 극락정사로 오르거나, 갈령에서 청계산 정상으로 올라 남으로 내려오거나, 또는 청계마을 옆으로 극락정사로 오르는 크게 3가지의 길이 있다. 해발 877m 고지의 남으로 뻗은 전체 산줄기의 남쪽으로 치우친 중간 부분으로 해발 710m 고지에서 시작되는데, 이 산 그 아래로 이어지는 능선을 동쪽 성첩(城堞)으로 하여 서쪽 사면에 쌓았다. 축성 방법은 산기슭의 아래가 되는 서쪽 성은 석축(石築)을 하거나 석축한 다음 안쪽을 내탁(內托)한 곳도 있지만, 절벽 위와 같은 경사가 심한 곳은 석축을 했으며, 그 외는 많은 부분이 토축(土築)을 했다. 능선 위가 되는 동쪽 성은 바위 절벽을 그대로 자연성으로 이용하면서 암벽과 암벽 사이는 토축을 했다. 이 산성 일대는 조선 말 동학 의병들의 은거처(隱居處)였기 때문에 1907년 11월 왜군의 방화로 사찰의 기록과 유물은 모두 소실되었다. 또한, 1950년 7월 17일~21일 한국전쟁 화령전투에서는 승전보를 올린 전투 현장이었는데, 성 둑 위에는 당시에 판 참호(塹壕)의 흔적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 남아있는 천연 요새(要塞) 지역이다. 성의 규모는 폭이 약 120~150m로 좁은 편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1,500m나 되고, 둘레는 3,340m의 토석성이다.

산성 내에는 성문 지(城門址), 암문(暗門), 대궐(大闕)터, 저수지(貯水池), 건물 터(建物址), 맷돌, 돌확, 우물 터, 차단성((遮斷城) 을 비롯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이 산성은 유일하게 동쪽으로 트인 곳이 있으므로, 차단성은 49호 국지도변 양지마을과 청계마을로 가는 중간 목 지점에 내(川)를 가로질러 남북으로 축성했는데, 그 길이는 약 165m로 그 시기는 1730년경이다. 수문(水門)도 있었으나 1998년 집중호우로 일부가 유실되고, 작은 논(畓) 복구공사를 하면서 일부가 또 없어졌다. 성문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신방석(信枋石)이 하나 있었는데, 이마저도 1995년 마을 진입로 확·포장 공사 시 없어져 아쉬움만 남는다.

산성 내외 곳곳에서는 지금도 삼국 시대의 회청색 경질 토기 조각과 고려 시대의 자기 조각, 조선 시대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고성이란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성 안에는 옛 산성창(山城倉) 자리라고 알려진 곳에 극락정사가 있고, 건물터와 우물터 및 저수지 시설의 터도 있다. 또 여러 곳의 바위 위에는 확실한 용도를 알 수 없는 지름 20~30cm. 길이 5~10cm의 홈을 1~3개씩 만들어 놓았다. 산성의 흔적이 군데군데 뚜렷하게 많은 부분이 남아 있어 보호의 손길이 시급히 필요한 실정이다.

바깥 대궐터에서 동남쪽 약 1.5km 떨어진 산 아래 청계마을 뒤에는 산성 이름에 걸맞게 견훤을 제사 지내는 신당(神堂)인 선신각(仙神閣)이 있는데, 현판은 ‘후백제 견훤왕 묘’(後百濟甄萱王廟)라고 걸었고, 위패(位牌)에는 ‘후백제대왕신위’(後百濟大王神位)라 썼으며, 정면과 측면이 각 한 칸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에 풍판을 달았다. 또 신당 위 서북으로는 옛 청계사의 터가 밭으로 변해 있다. 청계마을 안쪽에는 청계사(淸溪寺)가 있는데, 전통사찰이다. 특히 청계마을은 병화(兵禍)를 모르고 살아왔으며, 6.25 한국전쟁에서 희생자가 전혀 없어 전설적인 이상향 우복동(牛腹洞)이라 부른다.

상주지역은 북쪽의 견훤산성, 성산산성, 화령고성, 금돌성이 서북으로 일직선 상에 놓여 있어 시대마다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곳이다. 산행은 극락정사 주변에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갈령~청계산 정상~710m 봉~746m 봉~극락정사~49 국지도 극락정사 입구로 5시간 내외가 소요된다.
(참고: 尙州市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