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 '퇴강 성당'
상주시 사벌면 퇴강물미길 8
지방문화재자료 제520호(2007. 5. 7)
풍광(風光) 중에서도 물이 흘러가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그것도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곳은 장관이다. 상주에는 이러한 곳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벌면 퇴강리(退江里)로, 백두대간 밤원숭덕지맥이 오봉산을 지나 송현(松峴)을 넘고, 국사봉(國師峰, 385.1m)을 이루고, 다시 북으로 군암산(君巖山, 280m)을 낳고, 그 아래 자리한 아담한 촌락이다. 마을이 강가에 있어 물미(물뫼)라고 하는데, 퇴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상주 최고(最古)의 퇴강 성당(退江聖堂)이 있다.
이 마을 앞에는 군암산과 비봉산(飛鳳山) 그리고 청산(靑山)이 마주하고 있는데, 이는 속리산과 운달산 그리고 보현산의 끝자락이다. 산과 산 사이로 낙동강과 영강(潁江)이 만나는 상주의 승경지로서 낙동강의 시작을 알리는 “낙동강 칠백 리 이곳에서 시작되다”의 표지석이 지나는 길손을 반긴다. 풍수에서 물(江)은 재물을 나타내고, 먹거리 농사에 물을 대고, 물류가 왔다 갔다 하는 젖줄에 해당하기에 예나 지금이나 대단히 중요하다.
916호 지방도 변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 철쭉이 만개한 가운데, 마을로 들어서면 ‘慶尙北道 北部地域 天主敎搖籃地 退江(퇴강 旧 물미) 2002年 復活節’이라는 큰 표지석을 지나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한 퇴강 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대변하는 상주지역 최초의 천주교 신앙의 산실이다. 안동교구 소속으로 그 시작은 1923년이다. 성당 주변에 측백나무와 배롱나무는 오랜 역사를 알려 주는 듯한데, 붉은색 조적조 맞배 함석지붕의 단층 성당과 조적조 맞배 함석지붕의 이층 사제관은 평면과 입면에서 높은 건물과 뾰족한 첨탑, 대체로 수직적이고 직선적인 느낌을 준다는 고딕 양식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는 근대 건축물로서,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1956년에 건립하였다.
당초 공소는 지금보다 더 위쪽에 있어서 낙동강이 잘 내려다보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현재와 같이 당시로써는 크게 지으면서 현재의 자리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연혁을 보면 신자로서 최초로 영남 땅 상주지역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서광수(徐光修, 1725~1786)와 그의 5남인 서유도(徐有道) 일가로 전한다. 서광수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문중으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고 파적(破籍)을 당한 채 추방되어 자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홀로 5남의 가족들과 더불어 배모기 마을(현, 상주시 이안면 양범2리)로 피신(避身) 한 것이 처음이라 한다.
물미(퇴강)에 천주교 신자가 존재한 기록은 1868년 칼레 강(姜) 신부의 사목 서한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 서한에 따르면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한실(현, 가은읍 상내리)에 숨어 있을 당시인 3월 19일경 함창현 문산(文山, 물미)에서 이(李) 요한이 찾아왔으며, 그는 칼레 신부를 문산의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고 한다. 1866년 한불 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병인박해 이전부터 천주교에 관심을 보여 왔던 김해 김씨 안경공파 김헌영이 손자인 김극배에게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권유하였고, 김극배는 최면집과 함께 작골(척동) 공소 권(權) 회장에게서 성경책을 구입하여 탐독하였으며, 그 뒤 표석골(공평) 공소에 가서 1899년 봄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김극배는 당시 부자였으므로 자기 집(퇴강리 376, 377번지)을 공소로 활용하도록 봉헌하였다. 그 후 1921년에 새롭게 단장된 공소를 축성하였으며, 1922년 9월 이종필(마티아) 신부를 물미 주임신부로 임명함으로써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1969년(대구, 안동 분리 전) 이전의 상주지역 본당은 퇴강(1922년), 상주 서문동(1936년), 함창(1942년), 화령과 남성동(1962년) 성당이다.
또한 이 마을은 일찍이 이성인(李聖仁) 신부에 의해 1931년 12월에 설립되었던 ‘대건 학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최근 상주에는 전국 유일의 청리 삼괴의 ‘천주교 신앙 고백 비’와 상주 최고(最古)의 ‘퇴강 성당’을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성당 앞에는 두 물이 합수되어 넓은 호수를 이루는 가운데, 낙동강 칠백 리 표지석이 우뚝하고, 그 앞에는 국토 종주 자전거길이 이어져 달리고, 마을 뒤로는 군암산을 거쳐 국사봉에 이르는 산행길이 있다. 그 옛날에는 마을 위에는 하풍(河豊) 나루가, 마을 앞에서 와룡(臥龍)으로 내왕하는 광대정 나루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운성 나루가 있어 서(西)에서 동(東)으로 가고자 하는 행자(行者)는 반드시 이 세 나루 중에 한 곳을 이용한다.
물길을 따라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 1561~1625) 선생의 문학비(文學碑)가 서 있는데, 이재 선생은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서 은거하며 출새곡(出塞曲, 1616년), 자도사(自悼詞, 1621년), 매호별곡(梅湖別曲)ㆍ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 1623년) 등 가사 작품을 남겼다. 또한 이재 선생과 관련한 어풍대(御風臺) 있는데, 이는 인조 임금이 이재 같은 충절 지사(忠節志士)가 지리 풍수학적으로 매호가 여생(餘生)을 보낼만한 안식처가 될 곳인지 어풍을 이곳에 보내 관찰하라고 하여, 어풍이 왕명을 받고 매호에 도착하여, 이 바위에서 산세와 지형을 보며 휴식을 하고 갔다는 곳이며, 그 반대편에는 임호정(臨湖亭)이 있다.(참고: 상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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