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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8-21 09:22
상주 존애원 주치의(主治醫) 청죽(聽竹) 성람(成灠)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5,270  
상주 존애원 주치의(主治醫) 청죽(聽竹) 성람(成灠)

1599년에 세워진 상주 존애원 주치의(主治醫) 청죽(聽竹) 성람(成灠, 1556~1620)의 본관은 창녕(昌寧, 시조: 成仁輔), 지사공파(知事公派)로 초명은 협(浹), 자(字)는 사열(士悅)이고, 호(號)는 청죽(聽竹)이다. 아버지는 감사 세평(世平)이고, 어머니는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며,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요 실학자며 의술이 뛰어난 선비이다.
어려서부터 학자인 종형(從兄) 성호(成浩)와 서화담의 제자인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에게 공부하였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 ‘공경하는 마음을 지님을 가르키는 그림’이라는 「지경지남도(持敬指南圖)」를 제작하여 촉망받는 학자로 이름이 났다.
뒤에는 우율(牛栗: 牛溪와 栗谷) 양현(兩賢)에게 사사(師事)하여 실학과 성리학을 익혀 큰선비가 될 덕망을 쌓았다. 또한 배우기를 좋아해 나이에 상관없이 포저(浦渚) 조익(趙翼),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계곡(谿谷) 장유(張維) 등 후진과도 소통하였다.

상산지에는「成灠 泳之弟禀質淸介行己剛方人皆推重莫不警惕號聽竹官縣監(新)贈參判時東西分黨有詩諷之享雲溪書院昌寧勿溪書院」이라 적었고,
조선왕조실록(숙종 1년(1675) 4월 10일)에는
「京畿進士成虎錫等上疏, 請釋宋時烈, 上不納。 虎錫曾祖灠, 少游李珥、成渾之門。 好善悅學, 見重士友(경기 진사 성호석 등이 소를 올려 송시열의 석방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성호석의 증조 성남은 젊어서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유학하며 선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기뻐하였기에 사우들에게 존중을 받았다.)」라 적고 있다.

선생은 망국적인 붕당의 타파를 힘껏 주장하였는데, 이가 바로 「인구언론시폐소(因求言論時弊疎)」8조목의 만언소(萬言疎)이다. 당시의 망국적 병폐는 모두가 당쟁에서 비롯되었음을 전제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대부들 사이에서 청죽의 만언소를 참 선비의 충언(忠言)이라 말했다. ‘묘비문’에서 조익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의 이치를 깊이 구하여 그 정밀하고 투철하며 미묘함은, 당시의 의사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으며 아울러 구제한 사람도 매우 많았다.”라고 하여 명의임을 특기하였고, 권상하(權尙夏)는 “선생의 학문은 수준이 높았으며 의술과 제갈공명의 팔진법에도 능통하였다.”라 적고 있다.

선생이 병폐로 지목했던 붕당 타파를 실현치 못하여 임란 7년의 수모를 당하였는지도 모른다. 비록 큰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백성의 고통을 줄이는 일에 솔선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에 선생의 처향(妻鄕)인 상주로 이주하니, 전쟁의 참화로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 죽음의 문턱에 다다름을 보고 그들을 구제할 마음은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이때 상주에서 1599년 가을 낙사계(洛社稧)에서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비명횡사하는 이웃 동포를 구제하기 위하여 「존애원(存愛院)」을 세우니, 바로 전국 최초의 사설의료원이다. 선생은 율곡의 제자로 당시 서인이었으나 남인의 선비들과 생명의 존귀함을 구하고자 존애원의 주치의로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의료활동에 대한 선생의 기록은 남음이 적지만, 1726년 전오겸(全五謙)은 ‘존애원에서 병에 이로운 약을 제조하여 혜택을 입은 사람이 많다’라고 하였고, 1593년에 일묵재 선생이 두통에 시달릴 때 약을 제조하여 문병하기도 하였다. 청죽선생의 의술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1604년(선조 37) 선조가 인후증(咽喉症)과 실음증(失音症)으로 여러 날을 고생하자 내의원에서 의술에 능한 선비로 천거하였고, 1608년(선조 41)에도 왕이 장기 복용할 약을 제조함에 청죽이 천거되었다. 이로써 청죽선생이 존애원을 통하여 구제한 생명에는 최고의 의술이 시행 되었다.

공(公)의 고조는 증 좌찬성(贈 左贊成) 효연(孝淵)이고, 증조는 호조좌랑(戶曹佐郞)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완(琓)이며, 조부는 종부시(宗簿寺) 희주(希周)이고, 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세평(世平, 1516〜1590)이다.
공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여송(汝松)으로 주부(注簿)이고, 2남은 선교랑(宣敎郞) 여백(汝柏)이고, 3남은 한산군수를 지낸 여춘(汝櫄)이다.
상주시 외답동 노곡동록(魯谷東麓) 비각(碑閣)에 황명처사(皇明處士) 동곽(東郭) 성공진승(成公震昇), 화은(華隱) 성공진항(成公震恒)은 형제로 공의 손자이다.

공은 구언령(求言令)이 있을 때마다 수천언으로 진소(陳疏)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처가인 상주에 거처하면서 조익(趙翊)·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교유하였다. 벼슬은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된 이래 장원·별좌·공조좌랑·무주현감을 역임한 바 있다. 나라의 경영을 위하여 앞을 내다보는 혜안은 탁월하였음이 여러 곳에서 증명이 되고 있다. 특히 향리에서 백성을 구휼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며,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참 선비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이다. 임종이 가까운 때에 우복 정경세가 문병을 가니 ‘삶과 죽음은 밤과 낮같은 것이라 어찌 죽음을 슬퍼하리오’ 하였고, 죽음 앞에서도 공은 의연하였다고 한다. 매년 존애원 재현행사를 치를 때마다 공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져 가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선생의 유택은 노음산 국사봉 남쪽 자락에 있으며, 묘표의 명문(銘文)은「聽竹成先生之墓 贈貞夫人南陽洪氏祔」라 음각하였고, 묘소 입구에는 새로이「贈嘉善大夫工曹參判聽竹先生之墓 贈貞夫人南陽洪氏祔」라 새기고 있다.
묘갈(墓碣)은 조포저 익(趙浦渚翼)이 짓(撰)고, 안동(安東) 권상하(權尙夏)가 글씨(書)를 쓰고, 후손 원징(遠徵)이 전(篆)을 둘렀다.
내서면 능암리 재각(齋閣)은 편액을 「감모재(感慕齋)」라 걸었으며, 정면 5칸, 측면 2.5칸의 목조 팔작기와지붕이고, 5량가 3분변작법, 중당협실형이다. 들어가면서 왼쪽에 방 2칸, 가운데 마루 2칸, 오른쪽에 방 1칸으로 마루에는 중수기와 상량문이 걸려 있으며, 재각 옆에 현대식 건물로 청죽회관(聽竹會館)과 정원이 잘 조성이 되어 있어 후손들의 선조에 대한 숭모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청죽공실록”이 전한다. (상산지, 상주인물5 참조)